일본의 에히메현 감귤산지 무차차엔
목차
자연농법 창시자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숨결이 살아있는 감귤산지 - 무차차엔(無茶茶園) 한국생협연합회 국제팀장 김형미 자품 에히메현 세이요시 아키하마(愛媛県西予市明浜), 표고400m 정도의 산과 바다에 끼인 리아스식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남향으로 뻗친 사면에 약 80여 농가가 감귤재배를 하고 있는 지역농사법인. 탄생은 1974년. 자연농법 창시자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제자인 카타야마 모토오사(片山元治)를 중심으로 3명의 생산자가 시작했다. 농가로는 노상 드물게 2001년 ISO14001를 취득했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신규 취농 희망자, 연수생을 받아들이고 있다. 2006년 8월, 마이니치신문 주최 [제55회 전국농업콩쿨]에서 원예부문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Pal System생협연합회의 오래된 산지로서 조합원들에게 높이 신뢰받는 산지이다. 다음 소개는 무차차엔의 웹사이트에서 발췌 정리한 내용(www.muchachaen.com)이다. ■ 무차차엔은? 대지와 나란히 마음을 일구자! 환경파괴를 수반하지 않고 건강하고 안전한 요리 생산을 통해서 생태적인 손 역활성화를 추구하는 운동체입니다.
☆밀감 유기재배 무차차엔은 제초제랑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농약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감귤류의 생산, 판매를 주로 펼치고 있습니다. ☆대지와 같이 마음을 일구자 농업을 주축으로 하고 공서 전체가 훈훈한 마음으로 생선 행우 있는 농촌을 만들고 싶다, 환경에 부하가 적은 감귤재배를 통하여 우리들이 사는 지역의 자연환경을 향상시키자는 것이 중요한 동기입니다. ☆왼 손엔 술잔, 오른 손엔 마우스 현재 젊은이에서 70이 넘은 베테랑까지, 무차차엔의 생산자 대부분이 컴퓨터를 소유하여 농작업의 다양한 기록을 전자매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1년엔 ISO14001을 취득했습니다. 뒷배경 개선을 목표로 삼아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 분만 활동을 날마다 관리하면서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과시 무차차엔의 생산물을 소비자에게도 안심하고 먹을 운 있도록 제조 변리 정보를 공개하고 있습니다. ☆ 유기농업의 새로운 시도 무차차엔의 신규취농자를 받아들이고 훈련하는 기관인 Farmers’ Union 天步熟을 통해 대규모 유기재배 과수, 채소 재배를 목표로 삼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 농사조합법인 무차차엔 환경방침
- 기본이념 원래 생명을 취급하는 농가의 노동은 즐겁고 여유가 있는 것이었는데 현재의 농업은 이를 빼앗고 화학비료와 각가지 농약을 남용함으로써 환경과 자연계의 생명을 사멸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노형 정도는 온난화현상, 물과 공기오염을 진전시켜 오염이 유전자 차원으로까지 심각해 졌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이 된 이상기후로 말미암아 시중 각지에서 농작물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무차차엔은 환경파괴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건강하고 안전한 음식 생산을 통해 생태적인 논밭전지 만들기를 추구하는 운동을 실천해 왔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ISO14001를 취득하여 지구인의 의무이기도 한도 환경보전에 보다 더욱더욱 노력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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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방침 1) 환경법규 및 조직이 동의한 자주기준을 준수하고 경관, 쾌적함, 심리적 편안함, 생물다양성 보전을 실천한다. 2) 화학비료, 화학농약 사용을 삭감하여 토양, 수질, 대기오염 방지에 힘쓴다. 3) 환경부하가 적은 거리 구입, 사용을 추진한다. 4) 폐기물을 적정하게 처리한다. 5) 조달처의 환경활동을 고려하고 출하처에 환경활동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한다. 6) 병충해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신기술 학습과 신품종으로 바꿔 심기를 추진한다. 게다 영농활동을 정기적으로 감사하여 개선함으로써 오염 예방과 지속저긴 개선에 힘쓴다. 이상과 같은 환경관리시스템을 문서화하여 실행하고 유지하며 전통 생산자와 직원이 주지함과 동시에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한다.
- 무차차엔의 환경활동 활동항목 어떻게 할 것인가 화학농약 사용삭감 농약 사용을 무차차엔 재배지침에 따라 최처한으로 억제하고 병충해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예방처지 대응에 힘쓴다. 화학비료 사용금지 비료내용을 명기하고 화학비료 사용금지를 철처하게 실천한다. 찌꺼기 적정처리 폐기물의 내용을 확인하여 적정하게 처리한다. 비누 상용 추진 세정시에는 비누를 사용하고 합성세제 사용을 줄인다. 녹색 구매 추진 환경에 부하가 적은 녹색 구입(에코 마크)을 높인다. 이외에도 환경법규 준수,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며 무차차엔의 생산물은 몽땅 위와 같은 환경활동이 준수되는 재배, 생산공정에서 생산, 관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교 과정의 작업을 기록한 농사일지를 활용하여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강 계획을 수립, 실천하고 있습니다. 시고로 과정을 통해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농산물을 공급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차차엔의 생산물 1) 감귤류-온주밀감을 비롯한 다양한 감귤류를 연중 생산 2) 감귤류 가공품-쥬스, 냉동밀감, 감귤마말레드 등의 가공품. 3) 주잡곡, 채소류-Farmers’ Union 天步熟의 신규 취농자가 생산한 품목들. 4) 宇和海 해산물-잔 멸치, 모양새 진주 등을 판매 *무차차엔은 생협, 유기식품 전문점 등에도 출하하지만 자체 회원제를 두어 가지가지 생산물을 공급함.(2002년 이승 약 5천여 명)
■무차차엔의 발자취 ☆유기농업과 만나다 아키하마는 에히메현의 서남부에 있으며 비가 적은 온난한 기후, 산과 바다에 둘러싸인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오래전부터 감귤산지였다. 1959년 농업기본법이 제정된 사과후 농업정책의 변화와 방금 수입을 높이기 위한 방책으로 있는 곳곳에 감귤을 심어 에히메현은 와카야마현和歌山県), 시즈오카현(静岡県)을 제치고 밑바닥 제일의 감귤생산지가 되었다. 오히려 1967년 심어 놓은 감귤나무에 뒤미처 감귤이 격분 시작한 나간 370톤이나 생산되어 감귤 값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 과잉재배 생산에 따른 가혹한 산지 경쟁이 시작되었다. 익금 산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요깡(伊予柑), 봉깡같은 고급만생종 감귤류로 재배 전환을 추진해 왔다. 이들 만생종 감귤류는 재배가 도통 어렵고 온주 밀감 이상으로 농약 비료가 필요했다.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는 생산자의 육체를 좀먹고 병원나들이가 다반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토양, 자연환경이 가속도로 파괴되어 산도, 바다도, 강도, 생물의 서식상태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래도 생산자들은 농약은 농사에 곧잘 드는 ‘약’이 아니라 농사 ‘독약’이란 걸 모르고 묵묵히 일했다. 어찌나 DDT가, BHC, 호리돌, 수은제가 사용금지가 되었는지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농약 병이나 포장지에는 사용 음곡 주의사항이 적혀 있는데 이건 역시 독약 상용 곡 주의사항과 똑같은데. 가액 폭락 하에서 감귤 생산자는 필사적으로 일하고 일하여 식물과 가축을 키우는 기쁨의 땀은 고통의 땀으로 바뀌었다. 시고로 상황을 보면서 우리들은 근대농업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농부의 특권은 천체 속에 녹아든 생활, 땀 흘리며 일하는 기쁨을 느끼고 평생을 흙과 같이 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 즈음 사회에서도 유해식품, 오염, 공해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여 아사히신문에도 ‘복합오염’이 연재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들이 ‘유기농업’이란 표현을 알게 된 것도 이익 소설을 통해서였다. 밤이면 밤마다 술을 들이키면서 ‘왜 고교도 없고 의사도 없는 시고로 시골구석에 쳐 박혀 살고 있는가! 이대로라면 농업은 끝이다. 뭔가 해보지 않으면……’하고 몇 백번이나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는 노두 무차차엔의 원형은 유기농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생겨나고 있었다.
☆무차차엔의 탄생 1974년 5월, 우리들은 관해 스님의 호의로 15a가 되는 이요깡 밭을 임대하여 유기농업 연구농원을 만들어 ‘무차차엔’이란 이름을 붙였다. ‘무차차’란 말은 스페인어인데 스페인에선 ‘아가씨’, 멕시코엔선 ‘언니’, 필리핀에선 ‘하녀’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네온 등불을 찾아 몰려가는 나비가 되기보다는 밀감 밭에서 팔랑이는 호랑나비가 되어보자, 무농약, 무화학비료는 무차인(안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욕심을 버리고 무차메차(죽이 되도록) 애써보자는 의미를 담아서 ‘무차차엔’이라고 이름 지었다.
1975년-78년까지는 평가 단계였다. 1975년에 이요시(伊予市)에서 자연농법을 실천하고 있는 후쿠오카 마사노부 선생님의 농원을 견학하고 후쿠오카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무차차엔은 무농약, 무화학비료 재배를 시작했다. 득 해에 수확한 이요캉은 농협에 출하했는데 겉모습이 사뭇 나빠서 대부분 가공용으로 처리되었다.
1976년, 길미 무렵에 근근 유기농법, 자연농법이란 개념이 이해되기 시작했지만 무농약, 무화학비료로 지속할 생목숨 있다는 전망은 없었다. 무차차엔의 농업에 관한 생각이 대충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977년 무렵이었다.
감귤을 전업으로 삼아 고수입을 올릴 핵심 있는 품종으로 갱신하기 위해서는 바탕 경제의 변화에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감귤농업을 주력으로 삼고 바다와 산과 다락 밭을 유기적으로 리사이클시킬 이운 있는 ‘마을 눈치 복합경영’이 이상적이며 가능하면 석유에 의존하지 않도록 하자는 방향이 정리되었다. 수익 해에 산에 자생하는 상수리나무를 베고 표고버섯 균을 배식하고 나가노현에서 일본쟈넨종 산양을 10마리 사와 복합경영 실험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미숙하여 과실 실험은 좌절하고 말았다.
유기농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생산된 생산물을 적정한 가격으로 판매가 가능해야 했다. 1977년 생산된 이요깡은 마츠야마시(松山市)의 자연식품점에서 판매되어 처음으로 우리가 기대했던 가격으로 팔렸다. 날찍 가게와의 만남을 통해서 농업의 문제에서 식생활, 공간 환경, 교육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점, 그러므로 무차차엔의 운동을 단순한 농산물의 생산방법의 차원이 아니라 식생활, 사회교육, 지역활성화 등과 같은 활동으로 넓혀가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1978년 매스컴(에히메신문, 아사히신문, NHK)에서 무차차엔을 보도하여 일약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신 덕택에 무차차엔은 많은 이해자, 지도자를 얻게 되어 그만 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빨 해 생산된 감귤류는 전국의 이해자들 덕분에 전량 판매가 이루어져 무차차엔 최대의 난제였던 판로 문제에도 전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도구 오일 이외에는 무농약으로 재배가 가능하겠다는 전망도 생겼다. 한낱 감귤은 나무를 심어서 약 7년이 지나야 돈이 들어오는 긴 작물이므로 재배기술의 확립은 15년-20년 걸쳐 천천히 검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노토피아(농민의 이상향을 추구하며-農topia) 1979년부터 무차차엔은 회원 각자가 실험재배 단계에 들어가 면적을 1ha정도로 확대하고 온주밀감, 이요깡, 하귤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확직전에 온주밀감에 녹색 풀 노린재가 대량 발생하여 절반 정도를 망쳤다. 게다가 전국적으로 생산과잉인 상태에서 판매도 즉금 안되어 비참한 사실 앞에 놓이게 되었다. 날찍 당시의 쓰라린 경험을 교훈삼아 1980년 2월엔 회원 6명이 상경하여 간다시장, 자연식품점, 생협, 소비자그룹, 일본유기농업연구회 등을 찾아가 재배기술에서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공부를 하였다. 이후 우리들은 매년 상경하여 연수를 쌓고 있다. 전국자연보호연맹 대회에도 참석했다. 시고로 교류들을 통해서 농업을 포함하여 자연을 소중히 하자는 노력을 펼치고 있는 많은 선배,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길미 시점에서 우리들은 차츰 대해의 흐름을 알게 되어 뒤로 물러설 자못 없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에 관시 전체의 감귤농원을 무차차엔처럼 만들자, 무차차엔을 마을활성화의 구상으로 진전시키자는 방향을 잡게 되었다. 득 해에 무차차엔 규약을 만들고 기관지 ‘천보(天步)’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80년, 마을이 과시 일본제철 폐광지에 미츠이물산이랑 짜서 LPG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들은 지금까지는 ‘지는 싸움은 징검다리 말자’는 주의였으나 댁네 때만큼은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LPG기지건설 반대투쟁을 벌였다. 그만치 힘든 싸움은 참 두 수순 거듭 하계 싫다.
결과적으론 다행히 이란 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미츠이물산이 건설을 포기하게 되어 건설계획은 폐기되었다. 우리가 왜 반대했냐면, 과소화되는 마을에 도시형 기업이 와서 아예 수준의 급료를 받고 좋은 승용차에 타서 에어컨을 튼 집에서 일요일에는 비키니를 입은 아가씨들과 노는 꼴로 마을이 바뀌게 되면, 땀과 잡초에 범벅이 되어 감귤 밭에서 일할 기분이 없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시고로 마을이 우리가 추구하는 마을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원자력발전소나 LPG기지 유치를 결정하는 전아 촌장도 과소화가 심각해진 마을을 보면서 내린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키하마마을(明浜町)은 이대로라면 50년 후엔 인구가 제로이다. 과연 나쁜 것은 촌장이 아니라 도시에 두기는 어려운 위험한 시설을 자본의 힘으로 농촌으로, 남녘 가난한 나라로 분산시키려는 부자들, 기업가, 환경파괴에 가담하고 앞쪽 사직 자원을 무절제하게 수탈하는 기업으로 생활을 연명하는 자들, 또는 그런 일을 하도록 남편은 여전히 두고서, 초록 지구를 지키자고 난리치는 아줌마들이라고 본다. (왜 농촌의 인구가 줄어드는가에 대해 생각지 않는다면 원자력발전소는 부녀자 없어진다)
우리 마을에 도시형 공업 유치가 중지된 덕분에 무차차엔의 노토피아구상이 구체화될 생명 있었다. ‘사계절이 다른 산과 바다, 자연을 즐기고 이용하고 공존한다. 아울러 노인에겐 보람을 주고 누구나 건강하고 장수할 복운 있는 마을, 이것이 농민이 생각하는 이상향, 노토피아이다’ 농촌이 원자력발전소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원자력발전소에 엄청난 사고가 터지거나, 아니면 원자력발전소가 필요 없을 만큼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지 않으면 댁 된다고 생각한다. 깃발을 들고 반대를 외쳐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도 무차차엔이 있는 우리 마을에 노토피아가 생길 운명 있을지,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소비자와 상호이해를 쌓으며 오래전, 오른쪽도 왼쪽도 모르던 동시대 일본유기농업연구회의 이사장에게 ‘감귤을 어찌나 잔디찰방 주십시오 ’하고 부탁한 상대적 있다. 그러자 이사장은 담배를 물던 손을 떨면서 ‘먹을거리를 사고판다는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형씨 당시는 진지하게 농사짓는 우리들이 도쿄까지 와서 야단을 맞는다는 것이 사뭇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들은 생활을 걸고 무농약 감귤을 재배하고 있는데 영서 거주소 않으면 살아갈 행우 없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익금 대머리!’하고 경쟁 직전 심정이었다.
‘돈을 번다(儲ける)’란 말은 사람(者)을 믿는다(信)고 쓴다. 신용할 만한 걸 만들지 못하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진리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팔고 사는 세상밖에 몰랐다. ‘먹을거리는 생산하는 자와 먹는 자가 서도 얼굴을 알고, 상호 이해하여 만들어 줄기 않으면 형처 된다.’ 바로 이 점에 우리들이 몰랐던 신들의 세계에 가까운 특별한 유통이 있다는 걸 배웠다. 길미 뒤끝 이사장에게서 깨우침을 받은 것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요행 있는 소비자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소비자들과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84년 감귤 가액 하락이 계속되고 이대로는 지역의 모든 감귤농가가 기력을 잃을 것 산양비누 같은 상황이어서 우리들은 과감하게 지역으로 무차차엔의 농법을 보급하는 단계로 이행했다. 재배기술 면에선 불안이 있었으나 판매가 순조로워 시도한 것이었다. 회원 수는 32명으로 늘어나고 무차차엔의 재배면적은 8ha로 늘어났다. 생산량도 1983년의 2배 이상인 200톤으로 늘었다. 발수 면에선 ‘무차차엔과 소비자 연대에 관한 약속’을 맺어 한층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였다.
1987년엔 농협 이사회도 유기농업부회를 두어 무차차엔을 인정하였다. 유기농업을 추구하는 농가는 대체로 농협에 실망하여 농협을 그만두었으나 현재에도 대책없는 농협이나 농민의 심볼 조직인 것만은 틀림없다. 가까운 장래에 필히 주도권이 유기농가로 돌아올 것이다. 인제 때까지는 투자라고 생각하고 서로 협력하며 흔히 만나고자 한다.
1988년엔 회원 55명, 재배면적은 34ha, 생산량 700톤이 되었다. 1990년엔 회원 수도, 재배면적도 공부 전체의 10%를 넘어 착실하게 젊은 농업자들에게 무차차엔의 방침이 침투되고 있다.
무차차엔은 일사인 소비자, 소비자그룹, 단체, 자연식품점, 소매점, 생협, 수퍼마켓, 시장, 학교급식 등 생각할 핵심 있는 모든 목록가 루트를 통해 판매하고 있다. 기본적으론 점방 얼굴이 보이는 관계를 판매활동의 기축으로 삼는다. 생태적인 부락 만들기를 추구하는 무차차엔으로서는 소비자와 뒤미처 된 만남을 하는 게 중요하나 마을전체를 무차차엔이 추구하는 유기농업화하기 위해선 매한가지 시장, 다양한 판로를 개척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농업(카다야마 모토오사) ‘공생의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며’
- 급속하게 발전하는 농업기술혁신 1-1 농업기계 쌀농사 기계화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파종, 모내기, 수확, 건조, 저장, 정미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도 드물게 고도의 기계화가 진행되어 대량 생산, 스스로 판매가 누구에게나 가능한 상태이다. 채소재배도 배추, 양배추인 경우엔 100ha까지 세간 재배가 가능하다고 하며 파종에서 포장, 출하까지 전용기계 시스템이 진전되었다. 댁 겉면 작물인 경우에도 전용의 각별 집물 개발이 추진되어 기계적으론 수모 작물이라도 대규모화가 가능케 되었다.
1-2 병충해 방제, 시비, 제초기술 농약, 제초제, 뭍 훈증제, 화학비료 등 발암성, 유전변성, 다이옥신, 환경호르몬, 더 나아가 유전자조작이란 테크닉까지 이용하여 대규모화, 저코스트화가 농약회사 주도로 이루어지는 샅 환경보전형농업을 추진하기 위한 기술도 발전하였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팀워크를 이루어 환경보전형 농업에 도전하게 되면 화학농법에 대항할 생명 있는 대규모 유기농업도 가능할 것이다.
1-3 신선도 사람 기술 신선도를 유기하기 위한 기술로서 Co2 ,질소 소망 충전, 탈아세틸렌기술, 수온관리기술, 신선도 유지제, 신선도 유지자재 등의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채소랑 과일을 신선도를 유지한 입때 수입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는 농산물을 국제표준가격화하여 환역 농산물 가격을 다국적 농산물 회사가 대략 결정할 생령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농사물 수입상사가 금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들은 이러한 국제경쟁에 대응할 운 있는 체력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 고령화와 농지문제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 자식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땀 흘리며 일하는 고당 모습을 보고, 땀 흘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며 부모를 버리고 고향을 등졌는가? 아니면 부모가 도시에 홀려, 농촌을 비하하고 땀과 흙에 범벅이 되는 숭고한 생업을 기피하여 자식들에게 도시로 가라고 했는가? 위언 신규 취농자는 의사지망자보다도 적다. 그리고 취농자의 고령화가 진전되어 쌀농사를 비롯하여 돈을 벌만한 작물은 없고 농지는 황폐해지고 있다. 시고로 정세이므로 의욕이 있다면 전국적으로 농지를 대규모로 집적하는 게 가능해졌다. 에히메현만 하더라도 10 ha단위라면 농지집적이 가능하다. 자본력이 없는 우리들은 기업이 대규모 농지집적을 이루려는 움직임에 대응해야 한다.
3, 신농업기본법 제정(기업의 농업분야 참가가 가능해진다?) 금시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업의 농업분야 참가는 언젠가는 인정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 득 문제는 형편없이 중요한다. 실제로 기업이 농지를 취득하여 농업에 뛰어들게 되면 기업에 의해 비옥하고 가치가 높은 농지의 매매경쟁이 시작되어 대규모 농업 전환이 가속화되고 농지가격은 치솟아 자금이 없는 농가는 이농하거나 벽지로 쫓겨나게 될 것이다. 농촌에 정주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출퇴근하는 농업노동자에 의한 출근농업이 시작된다. 은행은 지금까지는 농지를 담보물건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기업이 참가함으로써 농지도 담보 물건이 된다면 농협은 보다 위기에 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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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경영에서 패거리 가족경영으로, 협동노동의 진화가 필요하다 농업이 대규모화되면 기업경영과 공동조합경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나는 일본의 이강 농업은 기업과 조합이 혼재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아울러 기업과 조합이 여러 면에서 제휴하는 움직임도 나타날 것이다. 반면 일개 대기업의 자금이 흘러들어오는 경우를 전망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농산물 가격형성이 가능할 정도의 대기업 지배가 가능할 것으론 밑바닥 않는다. 기업화 생산이 진행되어도 중소기업의 난립이 예상되며 기계화와 더불어 기계화가 불가능한 분야의 수고 확보도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러한 활동을 유지시키는 것은 짜장 노동이다. 예전 가족들은 춘부장 일, 엄마 일, 아이들의 일이 각기 있고 급기야 가족이 성립하였다. 이런즉 것이 협동노동이다. 곧 노동은 인생교육, 사회교육의 장이며 살아가는 기쁨을 창조하고 느끼는 활동, 봉사활동이기도 하였다. 돈으로 바꿀 목숨 없는 다양한 가치가 살아 숨 쉬는 노동, 이것이 협동노동이다. 앞으로 지역사회에서 일을 할 때는 이빨 협동노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들은 가족경영에서 집단가족경영으로 공동노동을 진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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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가족경영(협동노동)으로 새로운 커뮤니티를 자초 고령화와 취농 인구 감소로 인해 농촌사회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들 말하고 있으나 장사 규범 확대가 이루어지면 기존 농가의 경영체질은 약화되고 겸업, 이농, 파산이 가일층 심각화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제 지자체가 구상하듯이 농협을 통한 농업이 체질강화, 제3섹터를 통한 부서 활성화, 다양한 이벤트를 유치한 촌 활성화라는 생각으론 붕괴하기 시작한 농촌의 재생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농업을 기업체 경영체, 공유 경영할 행복 있는 센스가 있는 농가 지원에 머무르지 말고, 이종 업종 동안 제휴를 포함하여 관청 재상을 위해 주민참가를 전제로 새로운 농촌사회의 재생계획이 필요하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는 누구나 우는 것밖에 몰랐다. 그렇지만 자라면서 기쁨을 알고 사랑을 알고, 땀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노인이 되고 거듭 아기로 돌아가 흙으로 돌아간다. 21세기는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과 생존하는 기쁨을 나누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시고로 눈으로 경제활동을 본다면 농촌에는 영리활동을 넘은, 과거의 운명공동체를 진화시킨 것과 같은 다양한 조직, 비영리 협동의 지역사회 협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본다. 늙은 부모를 봉양하여 돈을 받는 시대인 것이다.(개호보험, 연금을 빗대는 말) 농업경영을 지역에 뿌리내리면 짜임새 내에서 모두가 필요한 사업, 일을 창조할 수 있다면 일대 재생은 잘 가능하다.
- 토끼를 쫓고 붕어를 낚던 고항 우리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대지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향하여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소망한다. 고향에는 우리들의 문화가 있다. 여 문화를 지키고 계승한다. 더욱이 자네 문화가 시대의 변천과 같이 천천히, 생명이 진화하듯이 나릿나릿 바뀌어 가는 것. 도통 장 전 선조가 키워온 문화를 음미하면서 향국 땅에 묻힌다. 경제구조, 생산현장이 어떻게 바뀌든 간에 토끼를 쫓고 붕어를 낚던 고향은 막막히 있기를 바라고 싶은 것이다. 무차차엔의 궁극의 목표는 ‘토끼를 쫓고 붕어를 낚던 고향(일본의 유명한 동요, 고향의 첫 구절)’의 재생이다.
7.요람에서 무덤까지, 무차차엔은 해적선 알카디아 가슴 모항이자 휴양지 우리들은 주추 경제가 국제화하는 가운데 농산물 가격 투기성 요인의 증대, 기계화, 대규모화, 이상기후에서 오는 산출 불안정화 등의 조건을 포함하여 무차차엔의 현재의 감귤농업생산(급격한 경사지의 다락밭 감귤농원)으로는 장차 생활이 곤란해진다는 결론에 죄다 달았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일 생각하였다. 고향은 어린이를 낳아 키우는 곳, 늙어서 땅으로 돌아갈 곳, 경제학 전사들이 경제전쟁에 지친 몸을 쉴 명 있는 곳으로 최고의 조건을 정비할 삶 있으면 된다. 때문에 월자 않으면 여인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런 외방 온상 위에 경제학 기반의 재구축을 설계하지 않으면 도중 된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론 동시진행이지만) 근원지 기반이란 물질문명의 종언이 시작될 입치레 초록별 지구의 재생과 사람들의 마음의 재생, 숨결이 있는 모든 생명의 공생이란 관점에 서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자랄 명맥 있는 환경,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어린이는 모두의 보물이란 관점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하고 노인들과도 공생하며 모두가 같이 살아간다는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가능한 만큼 공부를 시키고 경제활동에 지쳤을 땐 회복될 때까지 고향에서 휴양해서 다시 경제 전투로 나갈 수 있는 것, 노인에겐 속뜻 있는 일거리가 있고 재택개호를 받더라도 고독하게 누워 있지도 않고 그렇게 만들지도 않는 것이다.
- 농촌과 도시의 공생을 위해 새로운 농업을 시작 에히메현 분위기 10 곳에서 100ha의 종합농장을 목표로 집단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들은 진자리 현에서 2곳, 합계 10ha의 농지를 취득하고자 하고 있다. 뜻을 같이 임계 사람들이 출자하여 대규모 환경보전형 농장을 건설하여, 모두가 협동노동을 하는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하나의 모델로 삼아 지역에 뿌리내린, 젊은이들이 살아갈 고갱이 있는 새로운 감각의 농자 건립 구축을 해보고자 한다.